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고려 제3대) (문단 편집) ==== 서경 천도 시도 ==== [include(틀:고려의 행정구역)] 947년(재위 2년) 서경에 [[장락궁|왕성(王城)]]을 쌓기 시작했다. 앞선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민심이 악화되었기에 정종은 개경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려는 목적에서 [[서경(고려)|서경]](西京)으로 천도를 계획한다. 당시 평양은 고려의 제2수도로 행정 단위는 평양대도호부 → 서경 → 평양부 순으로 바뀌었다. 천도를 계획한 시점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상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이점을 근거 삼아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쓰게 되었고, 이 탓에 서경 백성들조차 중앙 조정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경의 백성을 서경으로 강제 이주시켜 서경 시내를 채우니 개경 백성들은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커녕 그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